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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 한바탕 화르르 지나가고 고즈넉해진 가을 길을 달려 전남 보성 노동초등학교에 도착했다.

길고 낮은 건물에 칠해진 알록달록한 색들이 장난감 기차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학교였다.

전교생 27명이 공부하는 노동초등학교에서 오늘 색다른 활동이 펼쳐진다.

오늘은 그림책 작가 김병하 선생님을 만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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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하 선생님은 20년 가까이『칠칠단의 비밀』,『얼음장수 엄기둥, 한양을 누비다』등 어린이 책에 그림을 그려온 화가이다.

최근에는 『강아지와 염소 새끼』,『수원화성』, 『고라니 텃밭』등 그림책을 냈고 지금도 새로운 작품 구상과 강의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김병하 선생님은 오늘  『고라니 텃밭』으로 노동초등학교 아이들고 만난다.

소문을 듣고 설레는 마음으로 발걸음도 사뿐사뿐,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로 들어갔다.

조금 일찍 도착해 있으려고 부지런을 떨었건만 김병하 선생님은 전날 보성에 도착해 하루를 묵고 왔노라며 벌써 강연 준비중이었다.

“밤새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아이들 만나야 하는데 좀 걱징이네요.” 반회색 흰머리를 쓸어 넘기며 멋쩍에 웃는 모습에서 고라니 텃밭을 가꾸는 순박한 화가 아저씨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책상 위에는 수작업으로 만든 재료가 정리되어 있다.

“오늘 아이들과 활동할 재료인가 봐요. 선생님이 직접 이렇게 준비하세요 ?”

“네 . 강연에 쓰일 모든 재료는 제가 직접 다 준비해요. ”

아이들과 만나기 위한 준비물들을 보니 꼼꼼한 정성이 느껴져 오늘 대화가 기대되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
왁자지껄 아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녕 , 어서들 와 .”

환한 미소로 맞이하는 김병하 선생님 편안한 모습에 아이들도 이내 긴장을 풀고  ‘안녕하세요’ 인사 소리가 짹짹짹 요란했다.

강연은 아름다운 마을 풍경으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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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난 김병하 선생님은 자연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덕분에 작품 전체에 자연이 숨 쉬고 있다.

『고라니 텃밭』은 물론『강아지와 염소 새끼』,『까치 아빠』,『우리 마을이 좋아』,『보리타작 하는날』등 다수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피톤치드 같은 자연의 향기는 작가 내면을 그대로 보여 주는 듯하다.

『고라니 텃밭』은 경기도 남양주 천마산 산골짝 작업실에서 김병하 선생님이 직접 겪은 2년 반동안의 경험을 그림책으로 탄생시킨 작품이다.
식구들을 위해 알뜰살뜰 키운 텃밭 채소들을 몽땅 먹어치우는 염치없는 도둑. 애면글면 애써 도둑을 잡고 보니 새끼 딸린 고라니였던 것이다.
“산속의 진짜 주인이 누구일까?”
고라니가 던진 화두로 몇날 며칠 고민했다는 김병하 선생님은 결국 텃밭을 진짜 주인과 사이좋게 나누기로 했다. 그런 배려가 어디 고라니에게만 해당되었을까.
“어느 날 텃밭 주위로 작은 민들레 싹이 돋았어요. 그런데 제가 텃밭으로 왔다갔다 다니다 보니 민들레가 제 발에 자꾸 밟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주위를 동그랗게 돌담을 쌓아 주었지요. 그랬더
니 그 옆에 하나가 더 돋아서 다시 돌담을 쌓았는데 이번에는 하트 모양으로 쌓았지요. 얼마 후에 또 하나가 돋아났지요. 그래서 하트 모양은 무너지고 말았어요.”
작은 민들레 싹 앞에 앉아 돌멩이로 울타리를 만들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하니 그대로가 그림책 한 페이지를 보는 듯했다.
눈을 맞추다 

드디어 미니 그림책 만들기 시간.
준비한 스토리보드지가 나누어졌고 아이들 스스로 스토리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장면을 구상해야 했다. 과연 이 짧은 시간 안에 아이들에게 상상력과 창의력을 끌어낼 수 있을까. 도무지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미션이었다.
그 순간 김병하 선생님은 아이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스스럼없이 무릎을 꿇고,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머리를 맞대었다.
“그것도 참 좋은걸. 대단하다. 좀 더 다른 반전은 없을까?”
칭찬과 피드백을 적절하게 섞어 가며 꼬마 작가들의 사기를 높여 주자 아이들은 쓱쓱 그림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엄마 몰래 피시방 가기, 근육맨의 하루, 이상한 염소, 프라이드 치킨 등등, 기발하고 위트 있는작품들이 쏟아졌다.
선생님은 완성해 가는 아이들 작품을 하나하나 살피다가 한 작품을 보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것은 흡사 놀란 고라니 눈빛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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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손에 든 선생님은 겅중겅중 뛰어 선생님들에게 다가가 소곤소곤 물었다.
“이 아이의 작품, 실제 상황일까요. 혹시나 아이에게 상처가 될까 봐 미리 묻습니다.”
일 학년 한 아이 작품이 엄마가 집을 나갔다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작품 내용은 픽션으로 밝혀졌으나 혹시 아이가 상처를 입을까 조심하는 그 모습은 뭉클한 감동
이었다.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어린이 책을 만들 사람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아이들이 작품을 모두 완성하고 제출한 후,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이 되었다. 자신의 작품이 읽
히기를 기다리는 아이들 눈빛을 저버리지 못한 작가는 한 작품만 더, 한 작품만 더. 결국 거의 모
든 아이들의 작품을 소개해 주었고, 강연 시간은 정해진 시간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그러고도 작가 사인회 시간, 길게 줄을 선 아이들 요구에 싫은 기색 한 번 없이 응해 주었다.
“전 새 말고 다른 거 그려 주세요.”
“저는 돼지 그려 주세요.”
어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컨디션이 엉망이라던 선생님은 그렇게 한참 동안 아이들 곁을 떠나지 못했다.
조금은 허술한 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식사하러 가세요.”
강연이 모두 끝나고 담당 선생님이 급식실로 안내했다.
선생님은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고 휘적휘적 그 뒤를 따라 급식실로 들어가서는 금세 급
식판을 비우더니 갑자기 난처한 기색을 한다.

“어이쿠 이런. 밥을 먹어 버렸네.”
사연인즉, 보성에 사는 친구가 김병하 선생님이 강연을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로 달려와 강연
내내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중이라는 것. 그 친구와 점심을 함께하기로 해 놓고는 그만 깜박하고
식사를 해 버렸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금방까지 아이들을 휘어잡고 강연을 하던 멋진 작가의 허술한 모습에 함께한 사람들은 유쾌하
게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조금한 허술한 의외의 틈이 바로 김병하 선생님
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앞으로도 피톤치드 같은 청량한 작품을 계속 만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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