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하고 편안해서 더 행복한 그림책 읽기

2011년 5월 11일 수요일 오후 1시 봄이 막 지나가는 길에 여름이 올 듯 후텁지근한 날, 간밤에 비가 씻어 내린 길을 따라 그림책을 읽어주는 한 사람과 그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을 만났다.

 


그림책에 글을 쓰는 김인자 작가는 그림책이 가진 매력에 빠져 지난 20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그림책을 읽어 주고 있다. 그는 그림책을 읽어주는 동안 귀 기울여 듣는 아이들 얼굴이 재미났고, 더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서 직접 글을 쓰게 되었단다.


오늘 그림책을 함께 읽을 친구들은 인천 계양구 작전동에 있는 성지 초등학교 어린이들이다. 주변에 높은 건물이 많지 않은 성지초등학교는 아담하면서 하늘이 더 크고 넓게 보여 더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도서실과 바깥 복도는 온통 아기자기 친절하고 세심한 손길이 배어있었다. 아이들이 오기 전인데도 풍선과 환영 인사말, 그림책을 읽고 주인공에게 하고 싶었던 말, 인상 깊은 장면을 그린 그림들과 김인자 작가가 쓴 그림책들이 도서실을 왁자하게 채우고 있었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난 아이들이 하나 둘 도서실로 모여들었고, 약간은 긴장되고 설레는 맘으로 작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지초등학교에는 어머니들이 사서로 봉사한단다. 도서실 담당 송진라 선생님은 이 날,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어떻게 읽어줄 수 있을지, 독서지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김인자 작가와 함께 의논하는 자리도 마련했다. 그렇게 오전 시간에 작가와 만난 어머니들은 도서실에서 있을 어린이들과 만나는 자리에 함께 했다. 나는 아이들 45명과 어머니들 17명이 이제 열릴 그림책 세상을 어떻게 즐기게 될지 기대가 되었다.

 


그림책을 읽어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김인자 작가가 체구에 비해 좀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메고 도서실로 들어섰다. 천진하면서도 통찰력으로 반짝이는 두 눈을 아이들 눈에 하나하나 맞추며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기대감으로 설레던 아이들도 시선을 한곳으로 모아 작가가 하는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작가의 가방이 열렸다.


가방에서는 여러 가지 그림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작가는 촉각 그림책과 병풍 그림책, 플랩북들을 줄줄이 소개하고, 그림책이 얼마나 재미있고 다양한 것인지 보여주었다. 아이들은 호기심으로 들썩거렸고 엄마들의 반응도 좋았다. 아이들이 작가가 보여주는 여러 가지 그림책들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동안 작가는 곧 아이들에게 힘든 일이 무엇인지 묻기 시작했다. 그러자 봇물처럼 요즘 아이들이 하고 남음직 한 고민거리들이 터져 나왔고 작가는 그런 일들에 대한 해답으로 아이들 스스로 재미나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힘든 일을 털어놓은 아이들은 자기가 하고 싶고 재미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털어놓았다. 작가는 그것을 글로 쓰는 것, 즉 일기장에 답답한 일, 재미난 일들에 대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쓰는 것이 곧 글쓰기 연습으로 이어진다는 말을 해주었다. 김인자 작가가 하는 그림책 글쓰기도 바로 그런데서 출발했다고 한다.


할머니를 바라보고 관찰하다가 하고 싶은 말이 생겼고, 그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많은 사람들과 만나게 되고, 결국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엮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낸 첫 번째 책이 바로 <책읽어주는 할머니>란다. 이 책에 나오는 할머니는 작가의 어머니이고 손녀는 작가의 딸이다. 두 번째 책 <아빠 몰래 할머니 몰래>에 나오는 민지도 작가의 딸 이름이란다. 작가가 하는 말을 듣던 아이들은 누구나 책에 실린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더 즐거워했다.


아이들이 글쓰기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을 즈음 김인자 작가는 스스로를 작가 이전에 그림책을 읽어주는 사람이라고 다시 소개했다. 아이들의 얼굴이 의아해졌다. 마침 그 자리에 온 아이들은 이미 그림책에서는 졸업했다고 생각하기 쉬운 4, 5, 6학년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작가가 읽어주는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오늘 읽어줄 책은 <책 읽어주는 할머니>다. 책을 읽기 전에 우선, 작가는 스스로 책을 읽어보는 것과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것을 듣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느껴 보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이미 책을 읽고 독후활동까지 마친 상태였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모두가 숨죽여 귀를 기울였다. 특별한 기교도 현란한 성대모사도 없었다. 다만 낮은 목소리로 한 글자 한 단어를 또박또박 정성들여 읽는 것이 다였다. 나는 아이들의 얼굴을 골고루 살펴보았다. 신기하게도 모두가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림책 치고는 조금 긴 듯한 글이었지만 끝나고 나자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흡인력이 있었다. 아이들이 스스로 읽는 것과 듣는 것의 차이를 충분히 알아챘으리라 느껴졌다.


그렇게 작가가 그림책 읽기를 마치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들과 어머니들 사이로 행복한 웃음과 아쉬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잠깐이지만 편안하게 이야기를 따라 마음을 맡겼던 탓이리라.

 


요즘 아이들은 힘들다. 마음껏 놀기 보다는 무언가 학습해야 하고 달려가야 하고 따라 잡기를 강요받느라 다시는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을 자신도 모르게 잃어가고 있다. 보고 싶고 알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책을 찾아 읽으며 공부하느라 지친 마음을 위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오늘 성지초등학교 아이들과 김인자 작가가 함께 한 시간은 큰 선물이자 나침반이 되었을 것이다.


작가의 말대로 그림책은 자칫 쉬워 보이지만 실은 정말 만들기 어려운 책이라는 것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의 경험이 그림책을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을 믿는다. 그리고 나중에 자라서 언젠가 누군가를 위해 그림책을 읽어주어야 할 때가 오면 오늘 이 시간의 소중한 기억을 꺼내 볼 것이라 기대해본다.


좋은 그림책 읽기가 좋은 아이들을 길러낸다면 이 일은 내 아이뿐만이 아닌 지역으로 넓혀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김인자 작가의 무한한 그림책 사랑이 모두에게 전해졌으리라 믿어본다.

 


김혜진
그림책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