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는 90년대 그림책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 90년대가 그림책 단행본 시장이 시작된 때이고, 작가도, 출판사도 새롭게 그림책의 새 역사를 시작한 때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는 현재의 그림책 활황기를 맞이하기 위한 맹아기였다.
1980년대 이전까지 나타났던 다양한 시도가 90년대 이르러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나라 100시리즈(동화출판공사 1982)처럼 외국 그림책 전시회에 자극을 받아 출간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당시 용어처럼 ‘그림동화’ 수준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옛이야기를 소재로 한 선집형태였다. 전집발행 회사들의 ‘전래동화’ 행진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몇몇 출판사는 단행본 형태의 그림책을 출간하기 시작한다.

 

 

당시로서는 드문 경우지만 「사막의 공룡」(1992. 한림출판사)은 일본 어린이문학 작가 ‘타지마 신지’의 작품을 강우현의 그림으로 독자에게 선보였다. 이미 80년대부터 출판미술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오던 강우현은 「사막의 공룡」으로 명실 공히 형식과 내용을 갖춘 그림책 작가로서 앞선 모습을 보였다.


이때까지 외국 어린이문학 소위 ‘세계명작’을 간편하게 줄여서 그림책 형식으로 만들어내던 관행에서 벗어난 것도 이 작품이 갖는 상징성 중 하나다. 제대로 된 그림책 텍스트로서 완결성은 갖추면서, 각 장면마다 그림만으로도 이야기가 전해지는 구성을 보면 예전과 다른 분위기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작업은 텍스트를 작가 자신의 것으로 해석하고 이미지화 하는데 감각과 상상력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할 수 있다. 과거의 전래동화선집처럼 이야기를 따라가며 보조수단으로 삼았던 것에 비한다면 강우현의 작업은 단순한 그리기 이상의 적극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림책 작가, 일러스트레이터의 장르 독립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으로 이는 자연스런 이행과정이면서 이정표 구실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얼마 뒤 이동진의 ‘바보 이야기’ 연작이 나오면서 창작그림책에서 그림 작가의 위상이 한층 더 높아진다.
「바보와 나무」(계몽사, 1995) 1권을 시작으로 10권 「바보와 톱」까지 모두 글과 그림을 짓고 그린 작가는 이때까지 거의 없던 일을 성취시킨 장본인이다.


10권 모두 판화 작업 후 컬러 채색을 한 전통적인 기법이다. 표현된 인물과 배경 외에는 전체가 여백으로 남겨져 바보 캐릭터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그 두드러짐은 테두리선의 간결함 때문에 판화의 효과를 더욱 높이고 있다. 마치 한 편 한 편의 우화를 그림과 함께 감상하는 것처럼 짧은 이야기와 공간의 여백은 군더더기를 허용하지 않을 것처럼 빈틈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작가는 캐릭터의 일관성을 유지함과 동시에 ‘바보’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이용하여 슬그머니 틈을 열어두는 여유까지 보인다. 비록 조각칼의 예리한 흔적들이 부드러움을 잃게 하더라도 살짝 휘어진 입모양, 눈웃음을 보노라면 어느새 그 결점이 덮혀 버린다.

 

창작동요제에서 <노을>이라는 곡이 대상을 받으면서 노래로 더 익숙한 이동진의 또 하나의 장기는 직접 글을 짓는 데 있다. 보기 드물게 글과 그림이 모두 가능한 작가는 그래서 더욱 그림책의 판면을 잘 요리 할 줄 안다. 필요에 따라 어느 쪽이 먼저 일 것도 없이 서로 중요한 자리를 양보하듯 펼친 한 장면에서 보는 사람의 (또는 읽는 사람) 시선을 방해받지 않게 글·그림이 앉혀진다. 1권 6번째 장면에서 바보와 나그네가 저녁상을 마주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잘 나타난다. 그림은 일자형으로 배치되고 텍스트는 차려진 상 위쪽에 앉혀져 있어서 그림만을 보면 텍스트 위치가 거슬리지 않고, 글을 읽을 때면 가운데 충분한 여백이 있어서 방해받지 않고 단숨에 읽어 내려갈 수 있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나그네의 갓과 등짐이 놓여 있으나 이 장면 어디에도 방을 구획하는 선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 위쪽으로 봉창이 덩그마니 있을 뿐이다. 서로 따로인 것처럼 놓인 그림들이 전체로 보면 한 폭의 그림이 되는 것이다. 이런 장면들은 의도적인 배치 방식이기도 하겠지만 전혀 의도적이지 않게 보인다. 처음엔 텍스트를 놓고 그림을 구상했겠지만 나중에는 마치 그림이 놓인 자리 틈으로 텍스트가 들어가 있는 형상으로 잘 어울려 지내게 만들어 놓는다. 거의 모두 이런 구성으로 짜여 있어서 각 장면들이 어쩌면 독립되어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작가의 공간 장악력이 힘들이지 않고 행사되는 일은 차라리 직관에 의해서라고 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수 있다. 이는 작가 자신이 모두를 다룰 수 있기에 가능하기도 하지만 리듬을 아는 음악가여서 장면을 노래의 한 소절처럼 만들어 갔는지도 모른다. 지난 80년대 이우경의 옛이야기그림책선집처럼 이동진의 10권짜리 시리즈는 아마도 창작 그림책으로 보기 드문 사례가 될 수 있다. 그림책 작가로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이루기 힘든 성과지만 아쉬운 것은 이제 우리 곁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린이책의 대명사로 불리던 발행출판사 마저 잊혀진 지금, 다만 기록물의 하나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이들이 남겨놓은 것들은 그 뒤 바로 이어서 나오는 몇몇 출판사 창작기획으로 넘겨져 명맥을 잇는다. 그 중 하나가 솔거나라 시리즈(보림, 1995) 간행이다. 형식은 단행본의 독립된 소재를 취하고 있지만 내용은 전통문화에서 길어 올린 샘물이다.

고인돌, 한지돌이, 고구려나들이, 해시계 물시계, 꼬까신, 숨쉬는 항아리, 갯벌이 좋아요 등의 제목들에서 보듯 없어졌거나 점점 우리 곁에서 사라져가는 유형 자산과 자연을 보듬어 안듯이 기획 출간 되었다. 이 솔거나라 시리즈가 나오게 됨으로써 이후 해마다 다양한 분야의 전통, 민속 문화, 옛이야기들이 그림책으로 나온다.

 

정병규
‘어린이책 예술센터’ 책임연구원, 헤이리 어린이전문서점 ‘동화나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