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선집에서 특징이 다른 작가, 같은 작가의 작업에서도 스타일을 바꾼 작품, 세대간, 활동 분야를 달리하는 작업세계, 여러 가지를 경험하게 하는 만찬장은 이후에는 좀체로 보기 힘든 사례가 되었다. 이같은 여러 작가의 모음집 형태는 우리나라 사회환경이 만들어낸 독특한 세트 상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선집이나 학습을 위한 도구 형태의 출판물이 작가들의 시험 무대가 되는 좋은 조건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1993년 이른 봄 서른 권의 옛이야기 그림책이 나왔었다. 이 선집의 특징은 거의 대부분 글과 그림의 작가가 어린이책 전업 작가인 점에서 이전의 다른 선집과 구별된다.


「대연 전래동화선집」이라는 명칭으로 나온 평범하게 보이는 책들. 그 면면을 살펴보면 20여년 전의 움직임이 살짝 드러난다.

 


이전에 보였던 성인문학 작가들의 글쓰기와 화가들의 어린이책 그림 작업이 여기서부터 사라져 간다.
그림의 경우 어린이책에 일러스트를 하기 위한 전업 일러스트레이터가 본격 활동을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이우경, 이한중, 김박 등은 신문, 잡지, 출판물들에 1960년대부터 활동을 해왔고 이영원, 황성순, 강낙규, 최준식 등 일부는 광고 디자인과 그 분야 일러스트 작업을 해오면서 어린이책 출판 일러스트를 병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혜란, 이형진, 정승각, 한병호를 비롯한 당시 삼십대 전후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이제 막 어린이책에 일러스트를 하기 위해 시작했거나 어린이책 출판사들에서 삽화를 꾸준히 작업 했었던 일러스트레이터들이다.

 

글 작가들의 이력에서 보면 일간지 신춘문예 동화부분에 당선되어 등단했거나 아동문학상, 세종 아동문학상, 아동문학사상 등에서 추천을 받아 작품 활동을 해 온 작가들이 많다.


그런데 그림 작가의 경우 등용문이라 할 만한 공모전이 적었기 때문에 ‘한국어린이도서상 일러스트레이션 상’ ‘한국출판미술신인대상’에 응모를 많이 하기도 했다. 시각 예술의 특성상 등단을 통한 데뷔나 수상경력이 아니더라도 출판사의 스타일과 서로 부합하면 프리랜서 또는 전속으로 일 할 수 있는 것이 이 분야이다. 또한 그림책 작업은 광고, 그래픽디자인, 회화 등 어떤 작업을 해왔어도 가능하다는 점이 이들의 다양한 이력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선집 작업의 일러스트레이터 구성은 앞서 이야기 한 대로 세 부류가 고루 분포된, 그리고 세대도 신인에서 중견까지 안배되어 서른 권에서 모두 개성 있는 스타일을 구사한다.

 


현재, 중견으로 활동하는 한병호의 『혹부리영감』을 보면 이 무렵부터 자의반 타의반 도깨비를 그려내기 시작했고 수묵과 다른 재료를 섞어 사용하는 작업은 해가 지날수록 많은 작품을 더해가면서 농익은 기량으로 오늘에 이른다. 그의 작업중 대부분은 아니라도 여러 작품에서 도깨비를 그렸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도깨비전문 일러스트레이터로 굳어져 버렸다. 그러나 같은 선집 20번 『의리를 지킨 샌님』에서는 『혹부리영감』에서 보았던 수묵채색에 비해 그의 붓질은 다른 느낌으로 와 닿는다.

 


어떤 작품을 보아도 단순명료한 색상과 곧은 윤곽선을 내보이는 김천정의 『선녀바위』는 그의 스타일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하지만 작품 속 인물의 표현방식이나 색상을 보면 켤코 간단하게 보이는 그림이 아니다. 잔선이 거의 없는 작법이 화면을 강렬하고 접근을 쉽게한다. 마치 딕 브루너의 「미피」를 연상시키듯 눈동자와 거의 움직임없는 입모양에서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텍스트를 익숙하게 풀어낸다.


선집의 첫째 권 『방이전』을 그린 정승각은 21번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그리면서 서로 상반된 작품 세계를 보인다. 『방이전』은 종이에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고 『해와 달이 된 오누이』는 천 위에 아크릴 물감을 써서 같은 작가의 작업에서 각기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바로 다음 해(1994년) 작업해 낸 『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본보기로 훨씬 질감이 깊은, 재료의 물성을 살린 그림이 탄생된다.


『나무 도령』을 그린 류재수의 스타일을 제외하면 김환영, 조혜란, 이형진 등은 당시의 작업 스타일이 지금과 많은 차이가 있다. 『백두산 이야기』에서부터 색감과 굵은 붓질의 개성 있는 작법으로 눈에 익은 류재수의 작업은 『자장 자장 엄마 품에』에서도 역시 물감을 두텁게 발라 질감을 표현해 내는 그만의 기법이 이어진다. 다만 『노란 우산』 이후부터는 윤곽선이 없어지면서 색상과 톤의 변화로 이미지를 감상하게 하는 독특한 표현이 등장한다.


이처럼 하나의 선집에서 특징이 다른 작가, 같은 작가의 작업에서도 스타일을 바꾼 작품, 세대간, 활동 분야를 달리하는 작업세계, 여러 가지를 경험하게 하는 만찬장은 이후에는 좀체로 보기 힘든 사례가 되었다. 이같은 여러 작가의 모음집 형태는 우리나라 사회환경이 만들어낸 독특한 세트 상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선집이나 학습을 위한 도구 형태의 출판물이 작가들의 시험 무대가 되는 좋은 조건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결국 문학에서의 데뷔 무대가 신춘문예, 문예지였다면 일러스레이터들은 현재까지도 중요한 작업 현장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선집 또는 전집의 무명의 공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작가 프로필에 이 작품들은 늘 빠지기 때문이다.

 

정병규
‘어린이책 예술센터’ 책임연구원, 헤이리 어린이전문서점 ‘동화나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