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낮은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둘레에 따듯한 마음을 품었던 아름다운 사람 임길택 선생님! 두곡산방은 유고시집 <똥 누고 가는 새>의 시심이 잉태된 곳으로 임길택 문학의 향기와 발자취를 기리기 위해 꽃과 새와 구름과 함께 기쁘게 시비를 세웁니다.” 임길택 선생님은 교사이자 동화작가였습니다. 1980년 사북 탄광촌에 교사로 발령 받아 들꽃같은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며 ‘ 나도 광부가 되겠지’라는 학급문집을 내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문집에 실린 탄광마을 아이들 글에는 당시 사북 탄광 사람들이 까만 탄가루를 마시면서 고단한 막장인생을 살아가는 일상들이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광부 아버지를 둔 아이들의 투명한 눈에 비친 아버지 어머니의 고단한 삶, 가족들간에 오가는 내밀한 정서들, 아이들 세계의 숨김없는 일상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었습니다. 이렇게 탄광마을 아이들에게 교사이자 친구였던 그는 84년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으로 옮겨 학급문집 <물또레>(종로서적)을 내면서 풀처럼 꽃처럼 살아가는 더 없이 맑고 소박한 아이들의 일상을 동화에 담아냅니다. 임길택 선생님은 이처럼 어디를 가든지 아이들을 향한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되살려내곤 했습니다. 이런 관심과 애정을 교육운동으로 넓혀 83년 창립한 한국글쓰기 교육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 즈음까지도 글을 짓는다는 개념이 통용되던 분위기는 이오덕 선생님을 중심으로 한 글쓰기 교육운동으로 글은 쓰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바뀌고, 임길택 선생님도 힘껏 글쓰기 교육운동에 참여합니다. 아이들의 글쓰기 교육과 교사, 시인으로서의 감수성을 발휘하기 시작한 때도 이 즈음이었습니다. 90년 즈음 친구를 따라 경남 거창군 신원면 증유초등학교로 옮겨 첫 동화집 <우리 동네 아이들>(창비, 1990)를 펴내고 시집 <탄광 마을 아이들>(실천문학사, 1990)를 펴냅니다. 임길택 선생님은 <느릅골 아이들>(산하, 1994)을 잇따라 펴내면서 동화작가이자 시인으로 작가의 입지를 굳히면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90년 초반 한국 글쓰기 교육연구회 여름 연수회에서 ‘ 나는 동화를 잘 모르겠어요. 내가 쓰는 이야기가 동화가 말이 되기는 하나요. 이렇게 쓰면 되는 거예요?’라며 물었던 적도 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고, 누구못지않게 아동문학에 대한 열정을 가졌던 사람, 시인으로서 감수성이 빛나기 시작하여 한참 작가로서 세상에 빛이 되었을 나이에 그만 몹쓸 병이 찾아오고 맙니다.
97년 4월 발병한 폐암으로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임길택 선생님은 그해 12월 훨훨 세상을 떠났습니다.
교사이자 작가, 농사꾼으로 살아간 사람
문학기행을 준비하면서 임길택 선생님 작품을새로 읽으며 이제는 누구도 농촌 아이들 일상을 그렇게 정감있고 세세하게 그려내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임길택 선생님은 농사를 직접 짓지는 않았지만 농사철이 되면 가르치는 아이들 집으로 찾아가 바지를 걷어 올리고 논매기 밭매기를 서슴치 않는 농부가 되어 살아갔습니다. 거기서 겪은 이야기, 본 이야기, 들은 이야기, 아이들의 삶, 농촌 사람들의 삶이 동화가 되고 시가 되었습니다. 임길택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해서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그렇게 삶의 현장을 바탕으로 한 데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동문단에서 작품을 위해 삶의 현장을, 역사의 현장을 찾아 발로 쓰는 작가가 흔치 않기에, 자신이 발딛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은 임길택 선생님의 작품이 더 귀하게 다가옵니다.
이번 문학 기행은 <우리동네 아이들>(창비)의 배경지가 되는 강원도 쪽으로 찾아 갈 계획 이었습니다. 그런데 임길택 선생님 아내 되시는 채진숙 선생님이 그곳은 홍수를 겪고, 개발이 되면서 작품의 배경지가 사라져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고 전해주었습니다.
작가의 조그만 흔적도 문화적 가치로 부각시키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뿐입니다. 그래서 시집 <똥 누고 가는 새>(보리)와 <느릅골 아이들>(산하)의 배경이 되는 경남 거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거창은 교사이자 작가였던 임길택이 거창양민학살이 일어났던 신원면 증유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작가의
꿈을 키웠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번 여행에는 어린이 전문 서점 동화나라 대표이자, 파주 어린이책 예술센터 연구원으로 일하는 정병규 선생님과 경민대학 김성수 선생님이 함께 했습니다. 10월 27일, 온갖 색깔의 향연을 펼치며 아름다움을 뽐내는 가을 산과 들판 속으로 4시간 여를 달려 거창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임길택 선생님 시집 <똥 누고 가는 새>의 배경이 되는 두곡산방을 찾았습니다. 길안내는 거창동화읽는어른 모임 최정예 님이 맡아주셨습니다.
생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한 두곡산방
두곡산방은 해발 850미터가 되는 산 속에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까지 가장 가까이 했던 동무이자 시집 <똥 누고 가는 새>에 자주 등장한 ‘ 스님’인 해광 스님이 머무는 곳입니다. 해광 스님 뜻에 따라 여러 사람이 마음을 모아 임길택 선생님 시비를 세운 곳이기도 합니다.
두곡 산방은 마치 환타지 세계 속으로 들어가듯 가을 숲으로 한없이 들어간 깊은 산속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자연을 이루는 무수한 들풀과 온갖 색깔을 입고 계절을 비켜가고 있는 갖가지 나무들, 그 속에서 바람인듯 살아가고 있는 해광 스님은 임길택 선생님 만큼이나 해맑은 표정으로 우릴 맞았습니다. 단순하고 정갈한 집안팎, 스님의 먹거리가 될 가지가지 채소가 반듯하게 정리된 밭에서 자라고 있고, 호두나무, 생강나무, 고추나무 등 온갖 나무들로 가득합니다. 해우소마저도 어찌나 정갈하고 예쁜지 나오기가 싫을 정도입니다.
눈길 가는 곳마다 탄성이 나올만큼 아름다운 그곳에 임길택 선생님 시비가 있습니다. 옆에는 맑디 맑은 물이 흐르고 주변에는 온갖가지 나무와 꽃들이 피어나는 곳입니다. 스님이 직접 만들었다는 시비에는 임길택 선생님이 쓴, 해광 스님을 표현하는 글귀 하나 새겨져 있습니다.
스님재산
지게 너머 세워둔 / 작대기 하나 / 그리고 / 녹다만 눈 조금
-임길택-
시비에는 이 시 말고도 선생님을 기리는 동무들이 적어 놓은 글귀가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자네같은 사람이 살아있는 세상이면 살만한 세상이다 싶네” -황시백-
“가장 낮은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둘레에 따듯한 마음을 품었던아름다운 사람 임길택 선생님! 두곡산방은 유고시집 <똥 누고 가는 새>의 시심이 잉태된 곳으로 임길택 문학의 향기와 발자취를 기리기 위해 꽃과 새와 구름과 함께 기쁘게 시비를 세웁니다.”
2007년 4월 29일 임길택 선생님 생전 동무들이 두곡산방을 찾아 시비 제막을 축하하고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린이를 생각하는 사람들, 어린이 문학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창을 비롯해 전국에서 모이고 여기에 두곡산방 해광 스님의 마음이 모아져 아름다운 임길택 선생님 시비가 세워져 두고두고 선생님을 기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비를 돌아보고 해광 스님이 토굴이라 부르는 산방에 들어와 스님이 끓여준 진한 국화차를 앞에 놓고 앉았습니다. 스님과 임길택 선생님은 참 비슷하게 닮아 있습니다. 나무와 꽃들과도 닮았고 아이들처럼 맑은 모습도 그렇고, 사람 좋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임길택 선생님은 생애가 얼마남지 않은 시간을 이곳 두곡산방에서 가장 많이 보냈다고 합니다. 해광 스님에게 여쭈어 봅니다.
“두 분 만나면 뭐하셨어요?”
스님은 임길택 선생님이 그저 맑은 사람이었다고, 좋은 사람이었다고만 되뇌입니다. 그리고 둘이서 그저 웃고, 이야기 하고, 함께 잠자고, 밥 먹고, 똥 누고, 그렇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낸 이야기가 바로 시집 <똥 누고 가는 새>(실천문학사)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해광 스님은 임길택 선생님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넘치도록 갖고 있는것은 물론, 아동문학과 교육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해광 스님은 임길택 문학상을 제정했으면 하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거창 쪽에서도 힘을 모을테니 서울에서도 힘을 보태면 어떻겠느냐고 합니다. 농촌에 대해서 그만큼 애정을 가지고 사실에 가까운 묘사를 하는 작가가 또 나올 수 있을까 싶을만큼 진솔함과 소박함이 가득한 임길택 선생님 작품을 아이들에게 계속 읽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 임길택 선생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서, 그런 작품들이 계속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문학상을 제정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자 또한 우리 아동문학의 유산을 보호
하는 방법이기도 하겠지요.
스님께서 끓여 주신 국화차 향기가 방 안을 가득 메웁니다. 저녁을 들고 가라는 스님 말씀이 아니어도 일어서고 싶지 않았지만 가을빛을 마냥 뽐내는 두곡산방을 뒤에 두고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해가 산 너머로 설핏 기울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느릅골 아이들>의 배경지 : 증유초등학교
이제부터는 윤종협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임길택 선생님이 90년부터 4년 남짓 머물렀던 거창군 신원면에 있는 증유초등학교로 갑니다. 윤종협 선생님은 임길택 선생님이 증유초등학교 교사시절에 교감 선생님으로 근무하면서 2년 여 간 인연을 맺었다고 합니다. 윤종협 선생님께서는 임길택 선생님을 ‘ 어린이처럼 소박하고 꾸밈없고 욕심없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하면서 멀고먼 산길을 한 시간씩 걸으며 학교를 오갔다고 전해 줍니다.
거창에서 증유초등학교로 가는 길은 거창 양민 학살지 신원면을 지나 한참을 꼬불거리며 가도 가도 산이 턱턱 가로막는 첩첩산중이었습니다. 지금도 이러니 선생님이 활동하던 20여 년 전에는 얼마나 더 깊은 산골이었을까, 외롭지는 않았을까? 동무들이 그립지는 않았을까? 신원면 증유초등학교는 <느릅골 아이들>(산하)의 배경이 되는 곳입니다. 이 동화에 나오는 장면과 아이들이 생각납니다.
소와 함께 지내며 마타리꽃 향기도 맡아보고 돌돌 말린 아카시아 잎을 가만히 풀어보면서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 하기도 했던 혜영이도 만나보고 싶고, 오락실에 정신을 빼앗겼다가 버스 시간을 놓치고 깊고 깊은 산길을 돌아갈 생각에 그만 울음을 터트렸던 태훈이도 보고 싶습니다. 벌집을 캐다가 팔아서 용돈을 마련하는 데 재미를 들였다가 벌들이 무더기로 날아드는 바람에 혼쭐이 났던 개구쟁이 준태나 성호들도 궁금합니다.
하지만 ‘ 느릅골 아이들’은 이미 거창을 떠난 지 오래 되어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이미 어두워진 후에야 들어선 증유초등학교 운동장에는 풀이 수북합니다. 학교는 이미 오래 전에 폐교되어 을씨년스럽기만 합니다.
이 먼 길을 오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 살아계시고, 학교도 그대로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찾아간다면 얼마나 반가워할까, 맨발로 뛰어나와 두 손잡으며 좋아 어찌할 줄 모를텐데… … .
선생님이 가족들을 거창에 두고 혼자 기숙했다는 방은 오랫동안 사람의 온기를 받지 못하고 문이 닫힌 채 그대로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나와 반겨줄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학교를 돌아보고, 캄캄한 유리 너머 임길택 선생님이 아이들과 함께 했을 교실을 어둠 너머로 지켜보다가 돌아섰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내내 선생님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누구보다 교육과 아동문학과 아이들 문제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지녔던 사람이었습니다. 저 하늘 어디선가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보고 있을까요?
임길택 선생님 작품의 여운은 올해 여름 강원도에서 열린 특별한 공연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보리)는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임길택 선생님 강원 정선 사북읍 사북초등학교에서 초임교사로 재직할 때 64명 아이들이 쓴 시 112편을 엮은 시집으로 발간된 글 모음입니다. 탄광촌 아이들이 보태지도 빼지도 않고 탄광마을 삶의 풍경들을 솔직하게 표현해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책이지요. 이 책 내용을 바탕으로 한 뮤지컬 <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가 2008년 19일부터 31일까지 강원정선아리랑공연예술원(원장 김도후) 아라리예술극장(옛 광하분교)에서 열린 것입니다.
97년 12월 11일에 마흔여섯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으니 올해로 만 11년이 됩니다. 선생님께서 생의 한 순간을 사랑하는 가족과 아이들과 함께 머물렀던 거창에서는 12월 초가 되면 선생님을 기려 임길택 문학제를 합니다. 임길택 선생님이 쓴 책, 육필원고, 유품을 전시하고 선생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조촐한 잔치를 마련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임길택 선생님 작품을 찾는 것은 요즘 감각적인 글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매 순간을 아이들을 생각하고, 문학을 생각하면서 진실하게 살다 간 선생님 책이 좀 더 널리 읽혀서 아이들 마음밭을 일구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여행에는 거창 동화읽는어른 모임 최정예 선생님과 전 증유초등학교 윤종협 교감 선생님께서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와 두곡산방과 증유초등학교로 안내해 주시고 도움말을 주셨습니다.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임길택 선생님 저 서
● 동화집<수경이 / 우리교육> <느릅골 아이들 / 산하> <산골 마을 아이들 / 창비>
● 시집
<할아버지 요강 / 보리> <똥 누고 가는 새 / 실천문학사> <산골 아이 / 보리>
<탄광 마을 아이들 / 실천문학사> <나 혼자라도 하겠어요 / 창비>
● 어린이들이 쓴 글모음
<아버지 월급이 콩알만 하네 / 보리> <꼴찌도 상이 많아야 한다 / 보리>
● 산문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 보리>
조월례
아동도서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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